“가위 주세요” 하자, 휴머노이드가 건넸다… 수술실 들어온 AI 로봇 - 헬스조선
휴머노이드 로봇이 수술 기구를 잡고 집도의에게 건네는 모습./사진=오상훈 기자
휴머노이드 로봇이 수술 기구를 잡고 집도의에게 건네는 모습./사진=오상훈 기자
“그래스퍼 주세요.”
의사의 말이 떨어지자 수술대 옆에 있던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래스퍼를 향해 팔을 뻗었다. 기구의 모양과 위치를 인식한 로봇은 집게로 기구를 집어 의사에게 건넸다. 잠시 뒤 “가져가라”라는 말이 나오자 의사가 내민 손을 인식해 그래스퍼를 다시 회수했다.
17일 삼성서울병원에서 공개된 휴머노이드 수술 보조 로봇은 의사의 말을 듣고 수술 기구를 전달하거나 내시경을 움직이고 조직을 당기는 등 수술실에서 사람이 맡아온 보조 업무를 수행했다. 연구 책임자인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정용기 교수는 “지금은 수술실에서 기구 전달, 내시경 조작, 조직 견인 등 다양한 보조 업무를 사람이 맡고 있지만 앞으로는 상당 부분을 로봇이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염소 간으로 실제 수술처럼… 내시경 잡고 조직 당겨
이날 시연 수술은 담낭절제술이었다. 사람의 것과 비슷한 염소 간을 대상으로 실제 수술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집도의는 수술대 양옆에 위치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도움을 받아 혼자 수술을 집도했다.
집도의가 가위를 달라고 명령하자 한쪽에 위치한 로봇이 수술대 주변에 놓인 여러 기구 가운데 가위를 찾아 집었다. 이어 ‘클립’이라는 명령에 클립을 인식해 건넸다. 특정 위치에 놓인 물건을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집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로 수술 기구를 보고 어떤 기구인지 인식한 뒤 집는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반대편에 위치한 로봇은 내시경을 잡고 수술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수술 기구의 위치를 영상으로 인식해 기구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내시경 카메라를 조정하는 ‘비주얼 서보잉’ 기술이다. 수술자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내시경도 오른쪽으로, 위쪽으로 움직이면 위쪽으로 따라가는 방식이다. 이 로봇은 내시경 조작뿐 아니라 수술자의 명령에 따라 조직을 잡아당기는 견인 역할도 했다. 수술 과정에서 조직을 적절한 위치로 당겨 수술 시야를 확보하는 보조 역할이다.
다만 로봇들은 아직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날 시연은 최종 개발물이 아니라 개발 방향과 기술 구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증명(PoC) 단계라고 설명했다. 전체 과제는 5년간 진행되며 현재는 과제가 시작된 지 약 1년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수술 기구를 건네는 휴머노이드 로봇./사진=오상훈 기자
수술 기구를 건네는 휴머노이드 로봇./사진=오상훈 기자
◇‘수술실 인력’ 대체 목표
이번 연구는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추진하는 한국형 ARPA-H의 필수의료 혁신 임무 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성서울병원이 주관하는 5년간의 ‘ORchestra’ 프로젝트다. 삼성서울병원을 비롯해 국립암센터, 전북대병원, 서울대·성균관대 산학협력단과 레인보우로보틱스, 에이딘로보틱스, 하해호 등이 참여해 ‘효율적 수술환경 조성을 위한 휴머노이드형 피지컬 AI 기반 수술보조로봇’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발 배경에는 수술실의 인력 부족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정용기 교수의 설명이다. 정용기 교수는 “수술실에서는 집도의 외에도 내시경을 잡거나 수술 기구를 전달하고, 조직을 당기거나 석션하는 등 다양한 보조 업무가 필요하다”라며 “특히 내시경을 장시간 같은 자세로 잡는 일은 단순해 보여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데 3시간 수술이라면 한 사람이 그 시간 동안 내시경을 들고 있어야 하고, 움직임이 부정확하면 집도의의 수술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필수의료 분야에서 수술실 인력 부족 문제도 주요 현안으로 꼽힌다. 전공의 수급이 불안정한 데다 숙련된 수술 보조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야간·응급수술이나 지방·중소병원에서는 제한된 인력으로 수술실을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연구팀은 수술 보조 휴머노이드 로봇이 상용화되면 이 같은 인력 공백을 일부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환자 수술 적용까지는 검증 필요
휴머노이드 로봇은 기존 로봇수술에 활용되는 다빈치 로봇과는 차이가 있다. 다빈치 로봇이 의사가 콘솔에서 조종하는 정밀 수술 로봇이라면, 휴머노이드 로봇은 수술실 내에서 사람처럼 협업하는 조수의 개념이다. 팔 끝에 장착하는 도구와 제어 방식에 따라 여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범용성과 확장성에 초점을 맞췄다.
다만, 휴머노이드가 실제 수술실에 들어가기까지는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우선 안전성이다. 수술실에는 환자와 의료진, 각종 수술 기구가 함께 있기 때문에 로봇 팔끼리 부딪히거나 주변 기구를 건드리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환자와 의료진 모두가 휴머노이드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안전 시스템을 개발의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법적·제도적 문제도 남아 있다. 휴머노이드가 수술실에 들어와 의료진의 업무를 보조하는 상황을 현행 의료 규정이 어떻게 다룰지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용기 교수는 “오작동으로 환자나 의료진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어떻게 정할지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며 “2단계 사업에서 관계 기관과 협의해 기술 개발과 함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제 환자 수술에 적용할 수 있는 시점은 로봇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느냐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연구진은 우선 내시경을 잡고 수술에 맞춰 위치를 조정하는 비교적 단순한 역할부터 임상 적용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고 봤다.
정 교수는 “이번 시연은 시제품을 실험실에서 검증하는 1단계 결과물”이라며 “앞으로 실제 수술 환경에서 역할을 하나씩 구현하고 안전성과 성능을 검증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움=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정용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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